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스크바 공방전 (문단 편집) == 배경 ==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북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계급)|원수]]], 중부[* [[페도어 폰 보크]] 원수], 남부 [[집단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으로 나뉘어 세 갈래로 진격했고 각각의 목표는 당시 소련의 3대 도시였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였다. 그중 주공은 단연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를 공략하는 중부집단군이었고 그 선두에는 제2기갑군[* [[하인츠 구데리안]]]과 제3기갑군[* [[헤르만 호트]]]이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중부집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개전 시작 1달 만에 모스크바 바로 앞의 [[스몰렌스크]]에 도달했다. 북부집단군도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면서 목표를 이뤘지만, 남부집단군은 고전했다. 이는 전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인 [[게오르기 주코프]][* 당시 총참모장]가 재직 당시 엄격한 훈련으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함과 동시에 남서 전선군 사령관이 [[미하일 키르포노스]]라는 유능한 장군이었고 개전 초기에 소련군 배치가 남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계획한 북부와 중부집단군의 목표도 어려운 축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남부집단군은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를 요구 받고 있었다. 북부집단군의 도달 목표인 레닌그라드는 소련이 점령한 발트 3국의 도움과 발틱해를 통한 물자 운송, 독일의 우군인 핀란드의 지원을 받으면서 진행할 수 있었고, 중부집단군의 도달 목표인 모스크바는 폴란드 분할 직후 변동되고 있던 소련의 서부 주력군만 재빠르게 격파하고나서는 소련 철도를 따라 그럭저럭 진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남부 집단군은 일단 지도상의 거리에서 가장 먼 [[캅카스]](바쿠의 유전)까지 가야했으며, 가는 길은 평탄한 우크라이나였지만 도로가 뚫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발트3국과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들어가면서 소련군의 방어전략이 그대로 작동되고 있었다. 이에 독일군도 동부전선에서 남부집단군에 상당한 전력을 배치하였지만, 북부나 중부집단군의 상황과는 달랐다. 이때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키고 제2기갑군을 남부집단군을 원조하는 데 돌린다. 제2기갑군 사령관 구데리안은 이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의 자원이 더 중요하다"며 키예프 공략의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다.[* 구데리안은 이것이 패인이라고 전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기계화 부대장"에 기록해놨으나 현재 전쟁사가들의 의견으로는 당시 중부집단군은 격전으로 소모가 엄청났기 때문에 재편 없이 모스크바에 대한 공세를 계속하기는 힘들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Kiev-Battle3.gif|width=100%]]}}} || || 키예프의 소련군을 포위하는 구데리안의 기갑군 || 8월에 남부로 전출된 구데리안군은 남부집단군을 도와 9월 26일에 끝난 키예프 공방전에서 소련군이 30만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포로를 65만 명이나 잡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 전투 또한 격전이었기 때문에 구데리안군도 보급 및 재편을 위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전투에서 독일군도 15만의 손실을 입어서 상당 기간 동안 진격을 할 수 없었다. 남부지역이 평정되자 히틀러는 다시 중부집단군의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계속하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에서 제4기갑군(회프너 상급대장)까지 중부집단군으로 전출시켜 '태풍(타이푼)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독일군이 목표로 했던 모스크바의 가치는 매우 컸다. 우선 소련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소련 수뇌부의 근거지인데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등을 통해 소련 각지에서 온 병력 및 물자를 전선에 배치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자 생산지였다. 따라서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지상전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7월 말, 독일군은 [[헤르만 괴링]]의 주도로 [[모스크바 폭격|모스크바에 대한 대규모 공중 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런던]] 폭격처럼 수도 모스크바를 파괴해서 소련의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으나 의외로 튼튼한 모스크바의 대공 방어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모스크바에 대한 지상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